통신교리 '생명의 길'

제1편 입문

이옥수2024 2024. 12. 1. 19:43

1. 추구하는 인간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이 질문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된다.

질문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특권이며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요소이다.

 

 어린이는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 "이건 뭐야?", "저건 뭐야?"하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귀찮게 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배우고 성장하며 사건의 의미와 내용에 관심을 둔다. 사춘기 청소년들은

또 다른 의식의 눈을 뜨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내면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될 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 불리는 현대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통합하여 인간의 삶

을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다.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생활과 소통 방식을 함꼐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관계가 중시되던 대면 형태의 공동체가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은 지역과 소속, 계층을 뛰어넘는 온라인

비대면 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생명의 근원, 죽음의 본질, 죽음 후의 일에 대해

서는 여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죽음 자체를 없애 주지도 못하고, 인간을 죽음

의 불안과 절망에서 구하지도 못한다. 인간 실존,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수학적으로 끌어내거나, 과

학적인 관찰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나 기계 문명, 의학의 발달은 인간 생활을 한없이 편리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고, 점점 인간 수명은

길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이룩한 이러한 발전이 도리어 인간성과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며,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자동차의 발달과 함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통사고, 인류의 존폐를 위협하

고 있는 핵무기의 위력, 수많은 생명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가공할 전쟁 무기들, 현대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생산의 수단과 노예로 전락한 인간 존엄성, 산업 발달과 함께 야기되는 각종 공해와 그로 인한 부작

용 등 인간은 새로운 자가당착에 빠지면서 우리의 일상에는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이 쌓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발전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방향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누구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념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던지는 이 질문은 여라 가지로 표현되지만, 근본은 한결같은 하나의 질문이며,

인간은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2. 인간의 갈망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의 이성은 세 가지 기능 곧 '지능', '의지', '정서'를 지니고 있다. 지능은 '진리'를, 

의지는 '선'을, 정서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있다.  인간은 진선미를 위해 존재하며, 이것을 갈망한다. 진선

미는 어떤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초월적인 것이다. 인간은 편안히 쉴 수 있는 집과

맛있는 음식, 따뜻한 옷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인간이 찾는 절대 가치는 아니다.

오히려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록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악을 피하고, 선을 찾으며, 아름다운 

정서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자기 존재 의미

를 물을 수 있고, 모든 사물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숙고할 수 있는 명석한 정신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변형될 수 없는 신비이며, 이 의식이 있기에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생은 바로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달아 자신을 성숙

시켜 나가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다. 호두나무는 자연법칙에 따라 호두라는 열매를 맺으며, 고양이는 본능에 

따라 쥐를 잡는다. 인간 외의 존재는 그 고정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진선미를 위해서 살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여 불행해질 수도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 깨달아야 하며, 그 가치를 실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의 생활 태도와 방법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

지고 싶어 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근본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찾는 행복인데도 우리 주위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듯하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처음 정하였던 목표를 성취하였더라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크고 높은 것을 원하게

된다. 행복이란 우리가 바라던 것을 얻든가, 원하던 것이 채워졌을 때 우리 마음속에 찾아드는 느낌이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해도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아서 더욱 욕심을 내게

된다. 우리 주위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보다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바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

떄문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행복을 얻기 위하 자신의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절대적 안정을, 영속하는 사랑을, 끝없는 행복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느끼는 충족감은 오직 순간적이고 부분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충족시키지 못하는 갈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어째서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 태어나 특정한 문화와 역사속에 살다가 죽어야 하는, 유한 속에 사는 인간 존재가 무한한 갈망을 하고 있는가? 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이 지닌 갈망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기에 진시황을 불로초를 찾기 위해 애를 썼고, 오늘날 사람들도 몸에 좋다면 그 무엇도 마다치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고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며, 아무도

임종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구해 주지 못한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모든 것이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

애당초 왜 이런 것들을 얻으려 발버둥 칠까? 이것은 많은 사람이 온 세기를 두고 던졌던 질문이다.

 

3.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ㅅ냉과 우주의 궁극적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여 왔다. 또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갈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현대 인류학 연구에 의하면 원시인들에게도 인생의 궁극 

목적에 대해 탐구한 흔적이 남아 있다. 원시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물음을 초월적 임에 대한 외경에서 찾았다.

죽어야 할 운명에 놓인 인간은 그 허무함과 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영생 혹은 후세의 삶을 믿고 있었음이 그들의 장례 예식

에서 드러났다. 그들이 살았던 동굴에 묻힌 사람의 뼈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은 죽음 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죽은

이를 위해 정성 들여 장례식을 거행한 증거이다. 또한, 시신을 동물 사체완느 달리 정성 들여 매장하고, 죽음의 여행길에

필요한 도구나 음식, 동반자까지 함꼐 묻은 것도 그 증거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거주하던 동굴과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그림과 조각, 그밖의 예술 작품들은 모두 그들의 종교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간은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종교 생활을 하였으며, 현재에도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모두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인간의 지성과 종교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종교는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왜 종교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가?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현재

세상에는 서로 다른 종교들이 많지만, 모두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

 

 첫째, 모든 종교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려 한다. 종교마다 제시하는 해답은 다를지라도 그 질문은 같다.곧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며, 인간의 희로애락은 왜 엇갈려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참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나? 인간과 우주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신은 하나라고 믿는 종교(유일신교)와 여럿이라고 믿는 종교(다신교)가 있으며,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신을 믿는 종교,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 등등 다양한 종교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어떤 종교는 인간의 현세적인 일에만 초점을 두고 있으며 또 어떤 종교는 인간의 일생은 현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계속 생명이 연장되는 것으로 믿기도 한다.

 

 어쨋든 수많은 종교가 있고 또 각자 자기 종교가 옳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이 옳고 옳지 않은지 식별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진정한 종교를 찾기 위한 출발점이다.

 

 둘째, 종교는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에게 확신을 준다. 종교는 인생 문제에 과학적으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나, 인간의 삶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다. 어떠한 경우든 인생의 신비에 대한 해답은 과학적인 탐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동이다. 만약 우리가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증명을 추구한다면 아마도 종교가 주는 해답에 실망할 것이다.

종교는 과학적 이해 이상의 차원이다.

 

 과학은 우주의 물질, 화학, 생물학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삶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과학으로 인간의 자유나 인간의 존재 이유, 생명과 죽음 자체에 대한 신비를 해결할 수는 없다. 모든 사물의 존재에 관한 신비는 믿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바로 이 믿음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확신할 수 있다. 

 

 종교를 하남디로 정의할 수 없으나, 굳이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절대자와 나의 살아 있는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쨰는 종교의 대상인 절대자 곧 종교의 교의이며, 둘째는 종교 행위를 하는 인간 곧 인간이 지켜야 하는 종교 윤리이며,

셋쨰는 절대자와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종교 행위 곧 종교 의식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믿음의 내용인 

교의이며, 여기에서 종교윤리와 종교의식이 나온다. 각 종교는 이 교의에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우선 그 종교가 믿는 교리, 그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종교

윤리, 그리고 그 종교의 의식을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 종교 현상에 '종교'라는 단어를 쓰게 되어쓰지는 모르나 그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우리에게 종교가 어떤

것인지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종교'는 '종'자와 '교'자의 합성어이다. 조앚는 으뜸, 기둥, 근본 등을 뜻하며, 교자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교육의 으뜸이다.

 

4. 그리스도교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일찍부터 삶의 신비를 느낀 인간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여 인생에 얽힌

갖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종교에서 찾았다. 우리 조상들 역시 이러한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한 경탄과 두려움에서 막연하게나마 절대자를 섬겨 왔다. 모든 물체에

정령이 있다고 믿고(샤머니즘), 큰 나무나 바위에 정성을 바치고 무속인을 불러다 굿을 하였다. 그러나 인생 문제에 대한

샤머니즘의 해결책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선조들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고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찾았고 중국을 거쳐 들어온 불교, 도교, 유교를 통해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신 후기에 이르러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실학파의 남인 학자들은 인생 문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옮기거나 저술한 한역서학서를 알게 되었고, 함께 모여 연구하고 그 내용을 토론하였다. 학문으로 시작한 서학 연구는 마침내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일찍부터 현자들은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유한한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무한하신 절대자, 영원불변의 절대자만이 인간의 무한한 갈망을 채워주 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분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는 배워 믿게 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주의 신비와 인생에 관한 문제를 '장조주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꼐서 우리에게 대답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이 세상에 당신 자신을 더 분명히 가르쳐 주시려고 외아드님을 보내주셨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꼐서는 이 외아드님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음으로써 인간은 불안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는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평등, 자유사상을 바탕으로 한 내세의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인류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이 되었다.

 

 불교나 유교는 인간 이성으로 진리를 깨우치고, 그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자연종교'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터득하고 깨달아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느님꼐서 손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인간을 불안과 공포,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종교이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만 인간이 그 해결책을 알 수 있기에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가톨릭교리통신교육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의 구체적이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