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Poem

안톤 슈낙 Anton Schnack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옥수2024 2024. 12. 15. 03:20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 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初秋의 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궁성, 벽은 헐어서 흙이 떨어지고 어느 문설주의 삭은 나무 위에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문자를 발견할 때,

 

거기에 쓰여 있되 ‘이이세여,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글귀를 읽을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했던가?"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을까.

 

혹은 하나의 稚戱, 혹은 하나의 虛言,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아버지는 그때문에 애를 태우신 것이다.

 

동물원에 갇힌 범의 초조와 불안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그는 철책 가를 왔다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그 앞발의 끝없는 절망,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휠더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리하여 그가 이제는 우러러 볼만한 한 사람의 고관대작이요 혹은 돈이 많은 공장주의 몸으로서 우리가 우울하고 몽롱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 시인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게 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그것은 항상 창 앞에 한 그루 노목이 서 있던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에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고 한 줄기 소성이 귀를 간질이는데, 당신은 벌써 근 열흘동안이나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황혼이 밤이 되려는 즈음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처럼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느 예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거기 씌어 있기를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가 누워 있음”이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는 내  어렸을 적 친구의 한 사람. 

 

날이면 날마다 도회의 집과 집의 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초행길 낯선 시골 주막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곁방 문이 사르르 열리며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때 그때 불현듯 애수를 느낄 것이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 추수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고 일찍이 뛰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보이고 왕자같이 무성하던 아카시아 숲은 베어 없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과 흑

 

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고 있을 때, 만월의 밤 개 짖는 소

 

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배고픈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에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