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느 곳이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너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 오라.
- 낮은 곳으로 / 이정하
이 새벽 잠에 깨서 우연히 발견한 시인데요.
마지막 구절이 왠지 마음에 들어서요.
젊을 적 끌렸던 상대를 향한 나의 끊임없는 구애의 노력도 생각이 나고.
왜 그렇게 그의 영혼과의 합일을 원했는지.
한때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면서
관계에서 정신적 합일을 원한다고 했더니
그 남자의사가 비웃더라구요.
그런 일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일어날 수 없다고. ㅎㅎ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수도 안갈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있는가
왜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하고 눈물겨운 일이었다
- 길 위에서 / 이정하
상대를 알아가기 위해
그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보면 그 길을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 길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삶을 향한 성찰의 과정이던데요.
높낮이가 있어야 산이고 굴곡이 있어야 강이다
너에게 가자면 수천의 산을 넘고 수만의 강을 건너야 하느니
그것쯤이야 대수로운게 아니지만 막상 가보면 네가 문을 닫고 있는데야
네 마음의 부재
천신만고 끝에 당도했는데 너는 이미 외출하고 없다
지금 와서 어쩌란 말인가
되돌아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너의 문 앞에서
- 험로/ 이정하
시적 화자의 내적 갈등이 막 느껴지죠. 우리가 중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ㅎㅎ
그는 이미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도달한 그 길엔 나도 없다는 얘긴데.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물같이 흘러가는 그 존재를 어떻게 부여잡을 수
있겠어요. 인식의 틀 속에 가둬두며 단정지을 수 있겠냐고요.
순간 순간 살아 숨쉬며 변하는 그를 어떻게 관념의 틀안에 박제할 수 있겠냐구요.
결국 너란 존재 나란 존재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그런 존재의 본질을
깨달으면 고독한 정적속에서 오직 모를 뿐의 겸허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만이
남겠죠.
여기 해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
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이다
수수께끼로 만든다는 것은 곧 그를 신으로 축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가 던진 질문을 결코 풀어 헤칠 수 없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 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일 뿐이다
- 사랑의 단상 / 롤랑 바르트
진실로 바꾸는 일이라.
고독한 정적만이 남는다는 얘긴데
그 정적속에 순간 순간 느껴지는 내 느낌과 감정과 생각과 관념은
진실하다는 얘기일까.
모르겠네요. 오직 모를 뿐.
모두가 잠든 이 새벽 잠에서 깨어
오늘도 어김없이 종교적 행위를 하고 있는
나에 대한 경종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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