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철님, 안녕하세요.
어제 잠이 일찍 들었는데 새벽 1시 넘어 깨서
트렁크 5,6회를 봤어요. 7,8회까지 다 볼까 하다가
소중한 알사탕을 다 먹어버리면 안되지
내일을 위해 아껴놔야지 하는 생각에
내일 보려고 남겨놨어요. ㅎㅎ
1시면 새벽이 아니라 한밤 중에 봤다고 해야 하나요.
평소엔 새벽에 일어나긴 해도 잠을 잘 잤는데
왠지 오늘은 한 밤중에 잠에서 꺠더라구요.
자기전에 지철님이 좋아하셨던 뮤지션 마이큐님
최신 앨범 듣고 잤는데
전 인디밴드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노래가 다 가슴에 와 닿던데.
가사도 너무 다 좋고.
왜 지철님이 좋아하셨는지 알겠더라구요.
지금은 4시니까 한밤중은 아니고 새벽이네요, 그죠?
옛날, 아니 한두달 전이니까 옛날은 아니지만
암튼 옛날에 지철님꼐 편지 드릴땐
이렇게 보통 한밤 중이나 새벽에 편지를 드리곤 했는데
이렇게 모두가 잠든 이 한밤중에
지철님 나오시는 따끈따끈한 새 드라마를 보고
새벽에 이렇게 지철님께 편지를 쓰려니
동장군이 그 얼음같은 차가운 외투로
온 세상을 휘감아도는 한 겨울에
내가 좋아하는
야채호빵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기분이네요.
전 차가운 것보다 따뜻한 게 좋던데.
그렇다고 겨울이 싫은 건 아니구
나름 추억 쌓기 좋은 계절이긴 하죠.
나뭇가지에 돋아난 여린 새싹이
추운 겨울을 나듯
얼음조각이 산산히 이 세상에 흘뿌려진
모두가 얼어붙은 이 겨울을
벽난로 옆에서 잘 버텨보렵니다.
근데 제가 산 벽난로 램프 두개가
다 고장났어요. 이건 오늘의 TMI. ㅎㅎ
또 사야되나 지금 고민중.
지금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거죠?
아 트렁크 5,6회 감상문을 써야되는 거죠.
이번 회차들은 마치
추운 겨울 호빵 먹는 느낌이라
제가 관련도 없는 얘길 지껄였나봐요.
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인지가 서연이 감시 카메라를 샹들리에에 부착한 걸
알게 되고 집에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를 위해 생선을 굽고 음식을 차려 기다리던
정원과 저녁을 먹은 후의 씬이었어요.
정원에게 맥주 갖고 올라가라길래
저는 다음 장면이 인지가
샹들리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다가가
손가락으로 퍽유를 날리거나
뭐 그런 통쾌한 복수의 화신이
될지도 몰라 했는데.
우리의 인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어꺠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더군요.
정원이 너무 불쌍해서
그동안 서연과 살면서 정원이 짊어졌을 그 무겁고
고통스런 삶의 무게를
그 여위고 갸날픈 어깨위로 짊어지면서
그 어꺠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더군요.
그 짐만으로도 벅찰텐데
그 짐만으로도 허덕일텐데
그녀는 깊은 슬픔과 연민으로
자신의 어꺠위에 얹혀진
정원이란 타인의 존재의 짐을
나누며 그렇게 슬픔으로 감싸주더군요.
오늘 인지에게 배웠어요.
타인의 깊은 고통은 퍽유를 날리며 통쾌하게 복수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지처럼 슬픔으로 감싸줘야 한다는 걸요.
그렇죠. 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양성애자 애인과 동거했던 그 낡은 빌라에
한 모퉁이에서 집을 짓고 살았던 거미를
죽이지 않고 그 거미줄을 다 없애지 않고
조용히 그 거미를 들어다가
흙 위에 옮겨 놓는 여자니까요.
우리에겐 흉측해 보이는 거미줄이
어쩌면 생명을 지닌 그 자그마한 미물에겐
너무도 포근한 집이자 가정이었을테니까요.
우리의 서연도
그 거미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일하는 여성으로서 임신해서 아이를 갖는 게 싫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열달을 온전히 다른 생명체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데
희생이란 단어가 뇌에 입력되 있지 않은 그녀의 자궁은
아기가 살지 못하도록 하려는지
아기에겐 너무 소중한 생명수
양수를 터트려 버리게 하고
담배를 피며 그 자궁에 반항도 해보지만
결국 정원보는 앞에서 차에 뛰어들었으니까요.
그녀도 어쩌면 저 거미같이 2년 동안
그 흉측한 긴 네다리로
열심히 거미줄을 만들어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하면서
정원과 나름의 집을 가정을 짓고 살았던 거죠.
결국 그녀는 다시는 그런 희생의 고통을 겪기 싫어서
임신하지 않으려고 루프를 안 빼다가
난소 하나를 제거하게 되는데
자궁 적출을 할 뻔 했다고 말하면서
얼굴색 하나 안 변하면서 말하는데
여자에게 자궁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제 아는 언니도 자궁 적출을 한 후
그 곱던 피부가 푸석해지고
여자로서의 삶이 끝난 듯
그렇게 아이 엄마가 되는 걸 포기하고 살던데.
서연을 아마 차라리 자궁이 적출되어
여자로서 엄마로서가 아니라
여자도 아닌 남자도 아닌
중성의 전지전능한 신이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녀는 모르는군요.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궁이 있는 여자야말로
자신이 그렇게 닮고 싶던
모든 걸 탄생시키고 조정하는
전지전능한 생명의 창조자
신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걸 말이에요.
"선생님, 아이요. 아이부터 살려주세요."
우리의 정원도 나쁜 마음은 품었군요.
생각보다 정원이 냉정한 데가 있더군요.
사리판단이 빠르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똑똑한 남자더군요.
그는 진정으로 서연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교통사고로 의식 불명인지는 모르겠으나
배가 불룩해 피 흘리며 쓰러진 자신의 아내보다
그 뱃속에 있는 자신의 자식의 안위를 더
살피고 걱정했으니까요.
"아이가 있었으면 했어요. 그럼
누군가의 아들로 살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로 살면 되니까."
이렇게 정원이 말하는 걸 들으니
그의 냉담함에 질리다가도 다시
그가 안됬고 연민의 정이 느껴져요.
그토록 자식이 갖고 싶었구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온전한 가정을 갖고 싶었구나.
그토록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구나...
정원에겐 가정이란
자신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전쟁터같은 곳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파괴된 영혼을 회생시키는
엄마의 따스한 자궁 같은 곳이기도 한가봐요.
불판위에 지글거리는
살아있는 육고기들의 꿈틀댐을
차마 볼 수 없어 인상 쓰는 정원이라면,
Happy Together 간판의 햄버거집에서
인지에게 키스하고
자기 자리에서 입술을 깨물고
목이 마른지 쥬스를 들이키고
당황한 듯 헛기침까지 하는
타인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정원이라면,
인지에 대한 감정을 깨닫고
같이 그녀의 우주로 퐁당 들어가서
함께 웃으며 카약을 즐길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주며 취미를 함께
할 수 있는 정원이라면 제 생각이지만
그는 진짜 좋은 아버지가 될 것 같던데.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란 뭘까요.
내내 신처럼 자기 아내를
감시카메라로 일거수 일투족
감시하는 의처증에
그걸로 몽유병인지 정신병인지를 얻는
엄마없이 자라서
학대받은 후마다
미역국을 끓여먹던
그 불쌍한 병든 아내를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집안에 가둬놓고는
때리고 학대하고
폭력이 끝나면
정신없이 자신의 거물을
불쌍한 그 멍든 영혼의 뒤로
박아대는 그런 남자가
과연 결혼이란 제도 속에서
안온하게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가정을 이룰 자격이 있는걸까요.
그 아버지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유전자를 다 받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와
송두리채 자신의 삶과 영혼을
흔들어대고 있는
인지를 꿈에서나마 베개로 질식시키고 싶은
살인충동을 느끼는 정원을 보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이 들던데.
그런 아버지와 너무도 닮아
멍든 영혼 정원을 길들이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마약에 손을 대게 하고
차마 그 업을 자기가 소화할 수 없자
구원의 손길 마냥 새 아내를 들이게 하고는
감시카메라나 달아대는 우리의 서연을 만난 건
어쩌면 신이 주신 기회였는지도 몰라요.
신은 우리에게 괜히 고통을 주지 안잖아요.
삶의 고통은 신의 은총이던데요.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될때까지
비슷한 패턴으로 비슷한 고통을 느끼게 하던데.
아버지와 아내는 정원에게는
신의 은총인지도 몰라요.
사람은 깊은 고통이 있어야
타인의 고통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고
홀로 고독한 시간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배양시켜야만
진정한 신의 구원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고통에서 해방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카약이 왜 좋은데요?"
"이걸 타면 섬이 된거 같아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이 되어서 떠 있는 기분이에요."
카약을 함꼐 타는 정원과 인지를 보면서
저는 둘의 결말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정원은 한번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없었고
인지와 같은 섬이 되 있었으나
그 섬은 진입금지의 통로가 막힌 섬이었고
인지처럼 고독의 섬에서 자신을 치유할 힘이 없었고.
결국
그 둘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지를 통해 자신의 상처가 점점 치유되고
마침내 정원도 뭍에서 물위에 둥둥 떠있지 못하고
물밖에서 물을 바라보는 낚시가 아닌
카약을 타면서 그렇게 호수인지 강물인지 물에 떠서
홀로 고독의 명상의 시간을 오래 갖아야만
우리 정원도 인지처럼
누/구/도/ 건/드/릴/수/없/는/ 섬/이 될테니까요.
물이란 뭘까요.
물은 왜 치유의 상징일까요.
저는 예비신자로서 교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천주교 교리를 알아가면서
성령세례라는 것이 왠지 물세례같던데.
장례식장에서 함께 나와
거리를 걸으며 정원이 그러잖아요.
"목욕하고 나온 것 같아요."
개운하고 좋다는 뜻일텐데
아버지가 죽었는데 이런 기분인게
정원도 좀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던데
뭐 저도 아버지 장례식 후
얼마간은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목욕하고 나온 것처럼
개운하던데, 정원처림.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긴 했어도 말이죠.
전 가끔 샤워를 하면서 샤워기의 물이 세례를 받으면
온 몸이 아니라 온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 같던데.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건 뭘까요?
물로 온 몸의 찌든 때가 녹아들 듯
물로 온 영혼의 찌든 때를 녹이는 과정이겠죠.
삶의 고통속에서 느낀 지긋지긋한
부정적인 감정의 때,
삶의 환희속에서 느낀 황홀한
엑스타시같은 황홀경의 때,
삶의 공허함에서 느낀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슬픔의 때.
삶의 순간 순간 고비 고비마다
우리의 영혼 곳곳에 찌든
그런 이런 저런 삶의 때들을
벗겨낼 수 있는 건
인지라는 존재로 상징되는 구원자의 목욕 세례와
그 세례 이후에도 계속되는
고독속에서의 명상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명상의 시간은 꼭 물 위나 방석 위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인지처럼 홀로 카약을 타거나
지철님처럼 물 위 배에서 오랫동안 낚시를 하거나
방석을 깔고 좌선을 하고 호흡에 집중하거나
뭐 그런 것도 좋겠지만,
설겆이하면서, 꽃내음을 맡으면서
비 내리는 거리를 홀로 혹은 같이 걸으면서
얼마든지 자신을 바라보며 살 수는 있는거니까.
우리는 얼마나 타인에게만 집중하며 사는 걸까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아픈 아내를 타인의 시선때문에 병원에 입원시키지 못하는 정원 아버지나
전 며느리가 시아버지 장례식장에 없으면 안되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서연이나,
그렇듯 우리 모두는 다
정원 아버지나 서연같은 면이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진실 앞에서 용감해야 합니다.
두 눈을 부릅 뜨고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만
그 진실한 마음으로 얻은 진실은
반드시 사수하는 용감한 마음이 있어야만
우리는 이 가식이 넘치는 세상에서
올곧게 정신줄 놓치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6화의 마지막 씬인
인지가 그 허름한 빌라에서
핏자국을 발견하고 열려진 현관 문을 바라보며
열까 말까 망설이더니
결국은 여는 씬은 기대감을 자아내더군요.
이 용감한 인지 앞에 과연
어떤 진실이 펼쳐질지 너무 기대가 큽니다.
감상평이 무척 길어져서
시간을 많이 잡아 먹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벌써 새벽 5시가 넘었어요.
그래도 다음 7,8회도 마지막이라
감상평이 길어질 것 같은데,
오랫만에 만난 좋은 드라마라
꼼꼼히 할 얘기가 많아 그러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7,8회 보고 나서 다시 올께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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