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Letter/2권. 우주대스타 공지철, 버드나무 이야기

서복 : 복제인간의 외피를 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 2024/12/20/00:38:08

이옥수2024 2025. 4. 27. 01:39

지철님,

 

방금 서복 영화를 보았습니다.

서복은 지철님을 발견하기 전에 본 영화인데

밀정처럼 다시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첫번째 영화를 본 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두번 쨰 영화를 보기에 앞서

제가 기억났던 건

서복이 마지막에 다 죽이는 장면밖에 기억이 안났어요.

그 땐 아 재밌다 뭐 그 정도였거든요.

 

근데 오늘 다시 영화를 봤는데

놀랐습니다.

 

이용주 감독님이 각본을 쓰셨던데

복제인간을 소재로 어떻게 삶과 죽음의

철학적 문제까지 다룰 수 있었을까요.

 

대사 하나 하나에서

직설적으로 풀어쓰긴 했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그만의 철학적

고민의 결과를 느낄 수 있었어요.

 

왜 몇 년 전에는 그 대사들과 주옥같은 장면들이

제 뇌리에 박히지 않았던 걸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기헌과 서복이 노을 지는 바닷가에 함께 앉아서

얘기를 나누던 장면이었습니다.

 

뇌종양이 재발해 땅을 뒹굴며 괴로워하다 잠든 기헌에게

자신의 피묻은 옷을 덮어주고는

복제인간 서복이 바닷가에 홀로 앉아 있는 장면이

먼저 보였죠.

 

최첨단의 인간의 기술의 원형과 가장 자연의 모습을 한 바다가

만나고 있는 장면인데

바닷가에 홀로 앉아 있던 서복이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고

왜 슬퍼보였을까요.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그라는 슬픈 존재를

품어주는 듯한 느낌은 뭘까요.

 

"아까 민기헌씨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하긴 뭐 지금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어."

"죽는 기분이 어때요?"

"안 좋지. 상당히 안좋아."

"왜요?"

"왜긴 왜야. 죽으니까 그렇지."

"그럼 사는 건 좋았어요?"

"뭐 좋을 때도 있었고, 안 좋을 때도 있었고.

좆같았을 때가 확실히 많았던 것 같고.

그러고보니 헤깔리네. 내가 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죽는게 무서운건지.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너무 후회가 돼."

"뭐가요?"

"내가 살아온 게. 너무 비겁하게 살았어."

 

기헌은 서복에게 동료가 내부고발자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은 무기력하게

그녀의 죽음을 지켜봤음을 고백하며

흐느껴 울지요. 그의 말대로 그는

너무 비겁했어요.

 

하지만 서복은 그를 위해

파도를 멈추게 하고

염력으로 돌을 끌어모아

죽은 그녀를 위한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새들이 그녀를 위해 추모하듯

날아가는 장관을 연출해주며

그를 말없이 위로해주는데요.

 

이를 통해 기헌은 조금이나마

죽음앞에서 나약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비겁한 모습으로 인한

자책감과 죄로 인한 상처를

서복의 위로를 통해

스스로 용서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죄로 받은 상처는 마음 속에 감추어두지 않고

입 밖으로 내는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의 효과가 있는거니까요.

 

서복 또한 울산 성당에서

자신이 어머니라 부르던

자신을 만든 임세은 박사의 

교통 사고로 죽은 남편과 자그만 아이의 사진을 보며

고통스럽게 슬프 우네요.

 

서복은 여기서 왜 울었던 걸까요?

자기란 존재는 임세은 박사의 아들인

죽은 한경운이라는 어린아이의 세포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자신이 한경운은 아닌 것을

그 어린 아이의 사진을 보며 

그냥 온 몸으로 느낀 걸까요.

 

"죽으면 정말 잠드는 거랑 비슷할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사람들은 왜 잠드는 걸 무서워하지 않죠?

잠깐 죽는건데."

"그야 다음날에 깨어날 거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그렇게 믿는거지. 아침엔 잠에서 깰거라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요. 하지만 영원히

산다는 것도 두려워요.

전 뭘 믿어야 두렵지 않을까요?"

 

여기서 신 神의 존재가 떠오르는 건 왤까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

밤이 있기에 낮이 존재하듯,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앞에 나약한 인간의 한계가 있기에

그 품에서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자비로운 신의 존재가 있는 게 아닐까요.

 

기헌과 서복은 서로를 치유하면서

그렇게 연구소로 다시 오게 되는데

찬란히 빛나는 햇살을 차 창밖으로 바라보며

서복이 말하네요.

 

"아름답네요."

"뭐가."

"살아있다는게요."

 

서복에게 있어 삶이란 뭘까요.

인슐린을 채취하기 위해 사육되는 돼지처럼

서복은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서복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려는 건

배부른 자의 사치일까요?

 

서복 프로젝트에 자금줄을 댄 서인 그룹 회장은

이렇게 말하네요.

 

"내가 세상 사람들을 다 살려주겠다는 게 아냐.

내가 뭐하러 그래. 누군 살려주고 누군 그냥

죽게 내버려두고. 그걸 내가 결정하는거여.

어때, 이거야말로 신의 권력이지. 안그래?"

 

트렁크의 전처 서연처럼

서인그룹 회장도 신이 되고 싶었나 보네요.

자신을 창조한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할 지 모르고 교만으로 치닫는

인간의 이 기술문명이라는 게

신을 닮은 자연을 외면해버리고

돼지에게 인슐린 채취하듯

서복에게 골수를 뽑아내듯

자연에게 뽑아먹으려고만 하는

이 인간의 기술문명이라는 걸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 미쳤어.

니들 같은 것들이 영원히 살게 되면 그게 바로

지옥일거야."

 

외마디를 지르며 서복을 살려내려 하는

기헌의 외침에서

차마 자식같던 서복이 돼지처럼

생명의 존엄성을 잃고 영원히 골수를 뽑아내는 걸

차마 못보고 자살한 임박사의 죽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봐야 할까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더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인간과 자연의 문제,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잊어버리고

미친 듯 내달라는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인간 문명의 이기를 다시 한번

고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서사가 있었어요.

 

"형 나 졸려요."

 

서복은 기헌의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이 내일 꺨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요.

아님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죽음 앞에서 

나약한 어린애마냥 투정을 부린걸까요.

 

우리는 항상 내일이 온다는 확신으로 

오늘 이 밤을 보내며 잠을 청하죠.

 

내일이 과연 올까요?

몇몇 사람들에게는

내일이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밤의 잠이 서복처럼

달콤한 죽음일 수도 있을 터인데.

 

죽음 앞에서만,

문명이라는 옷을 벗고 발가벗고

죽음이라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신의 은총 앞에 서야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내일이 다시 오지 않을 듯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지철님, 좋은 영화 감사합니다.

 

지철님은 트렁크에 앞서

이미 영혼 구원의 서사가 조금씩은 담긴

작품들을 만들고 계셨었군요.

 

남녀간의 관계의 표피에서 머무르는

잡다한 연애사가 아닌

한단계 더 깊은

남자들끼리의 우정이랄까요

이것도 사랑의 일종이겠죠.

이를 통해 동성간에도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랑의 강한 힘이 작동함을

보여준 이 영화의 서사가 놀라웠구요.

 

서복은 비록 죽었지만

기헌은 비록 혼자가 되었지만

마지막 장면의 바닷가 돌무덤에

비둘기가 내려 앉듯

그렇게 두 영혼은

비로소 평화안에서

쉬면서 어디선가에서도

잘 지낼 것 같아 안심이에요.

 

영화를 보는 내내

한마디로 한편으

잘 만들어진(Well-made)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철님의 너무도 마른 얼굴이

좀 마음에 남던데.

지철님은 온데 간데 없고

오직 기헌이란느 육두문자를 쓰는

거친 사내만이 살아숨쉬던데.

 

언제까지 지철님은

캐릭터 그 자체가 되실건가요?

 

영화를 보는 저희에게는

몰입할 힘을 주어 축복이지만

지철님이 영화 찍는 내내

그 주인공의 삶을 현실로 살아내며

고통스러워하시고

끝난 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내상을 입어

힘들어 하실 생각하면 좀 마음이 아파요.

 

기헌도 그렇고 정원도 그렇고

지철님의 캐릭터가 점점 소화해내기 힘든

인물로 치닫던데.

지철님의 내면에 가라앉은

이름모를 뭔가 그 모든 걸 휘젓고

뭔가를 끄집어 내야 하는 인물같던데.

 

배우로서 한층 성장하고 싶으시겠지만

캐릭터 자체가 되려하시기 보다는

그냥 한 40프로 캐릭터화 하시고

60프로는 공지철을 붙들고 계심 안될까요?

그냥 캐릭터의 가면을 쓰시고

공유와 공지철의 간극이

너무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예 간극이 없어져서

공지철이 캐릭터화 되버려서

공유랑도 차이가 안나게 되면

아무도 지철님을 보호할 수 없잖아요.

캐릭터 때문에 받은 내상은 어쩌나요.

 

캐릭터 가면 아래서 살아 숨쉬는

지철님을 어떻게라도 보호해 드리고 싶은

한 팬의 갸륵한 소망입니다.

이해해 주시는 거죠?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겠네요.

내일 눈을 뜨겠죠?

언제나 그래왔으니까요.

 

지철님과 팬 분들도

고단한 하루 마감하시고

푸욱 주무시길 바랍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죠.

 

오늘 하루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한번 좋은 영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또 뵈요.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