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 드린 Arvo part의 거울속의 거울이란 음악을 들으며 오늘 새벽을 열고 있어요.
어제도 아는 지인의 딸 분의 결혼식을 참석한 거 외엔 하루종일 이 음악을 들으며 보낸 것 같아요.
따뜻한 온기가 두 눈에 느껴진느 열나는 안대를 끼고 소파에 누워 컴컴한 어둠속에서 이 음악을 듣는데
마치 엄마의 어둡고 안온한 자궁속에 웅크리고서 저 위에서 들리는 반복되며 들리는 엄마의 심장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듣고 있는 아기의 기분이었어요. 그 단순한 리듬에 맞춰 엄마의 양수가 바다의 은은한
밀물과 썰물처럼 조금씩 내게 다가왔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흔들리는 저를 쓰다듬으면서요.
매우 편안한 기분이었지만 제 두개골 밑에 뒷 목덜미부터 등줄기에 이어 심장의 중심부까지 이어지는
딱딱하고 긴장된 굳은 무언가가 팽팽하게 느껴지던데. 뭔가 돌 속에 깊이 박힌 박제된 화석처럼 꿈쩍도
안했는데 그 음악속의 피아노의 둥당거림이 그걸 계속 톡톡 건드리는데.
그 나지막히 깔린 피아노의 반복되는 선율은 제 등을 안정적으로 받혀주는 듯 하고 바이올린 현을 따라 흐르는
그 활의 긁히는 듯한 팽팽한 소리는 제 가슴속의 딱딱한 그것을 리듬에 맞춰 건드렸다 떨어지고 건드렸다
떨어지고. 뭔가 바닷물결처럼 제 가슴을 부드럽지만은 않게 애무하는 듯한 느낌이 들던데. 그 몸에서 느껴지는
그 단단하고 팽팽한 줄기 다발이 다소 느슨해진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 단단한 건 뭘까요? 세월속에서 제가 순간 순간마다 느낀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느낌들? 불안과 공포, 두려움
긴장감 겁남 무서움 뭐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묵혀져서 그렇게 화석처럼 된 걸까요? 엄청 딱딱하던데.
감정이란 게 물의 속성이 있어서 흐르는 시간속에서 물처럼 흘러가야 했는데 왜 그렇게 가슴 속 깊이 고여
있는 걸까요? 제가 그 감정을 느낀 순간 순간마다 자연스럽게 흘려 보내지 못하고 억누르고 절제하고 둑처럼
가둬두고 그랬나봐요. 반 백년의 세월동안 그렇게 살았으니 제 몸속에 꽉 박혀 있는 딱딱한 그것이 녹아내리고
다시 흘러가게 하는게 쉽지많은 않은 작업이겠네요. 먼저 그 뻑뻑하고 뽀족한 가시처럼 섥혀있는 듯한
따끔거리는 그 뒷목의 긴장감부터 없어지면 좋겠는데. 그리고 딱딱한 것이 흐물거리면서 뭔가 울컥하면서 토
해내듯 가슴속에서 울렁거리게는 만들고 싶은데. 그러한 모든 것이 바로 치유의 과정이겠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어제 아는 지인 분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오랫만에 보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다소 긴장한 듯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있는 검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의 모습과 대비되게, 환하게 웃고 있는 천사의 날개처럼 나폴거리며
꽃잎처럼 포개진 아름다운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해맑은 모습이 대비되면서 그렇게 잘 아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들이 이해되면서 저를 미소짓게 했어요.
마치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그들의 젊은 날의 한 추억을 장식할 그 푸릇푸릇하지만 결기있는 책임감과
새싹같이 여리지만 단단해보이는 삶의 각오를 빛나는 찬란함으로 축복해주는 듯 하던데. 잘 모르는 그들이지만
저도 진심으로 축복했구요.
젊은 날에 결혼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아요. 제 삶에서 결혼이라는 게 한번도 진지하게 다가온 적은 없어 세월이
흘러 이제 애기도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홀로 살아온 제 삶에 후회는 없어요. 허공의 공기를 향해
자신을 망설임없이 내어주며 끊임없이 자신을 녹아내리면서 타올랐던 불꽃같은 삶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
촛농이 딱딱하게 굳어 남아있어 좀 걸리적 거리긴 하지만.
우리 지철님도 언젠가는 검은 턱시도를 입으시고 결혼식장을 들어서실 날이 오시겠죠? 아님 저처럼 그냥 평생
혼자 사실라나요. 한시라도 젊으셨을 적 결혼하는 게 좋긴 할텐데. 그 땐 또 지철님이 얼마나 멋지시고 순백의
신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저는 그 날 기분이 어떨까요? 환하게 웃으며 지철님의 행복을 기원하며 축복해줄려나. 아님 씁쓸히 제 주머니 속
눈없는 조약돌 지철님을 신부에게 뺏긴 기분이 들래나. 모르겠네요.
앞서 말씀드린 그 오랜 아픈 인연의 성직자 분이 결혼하실 땐 그의 결혼식엔 참석하진 않았지만, 그분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 맘 아프지는 않던데. 그가 낳은 아들의 사징을 보면서 그 분과 어딘가 닮았네 하며
미소짓기도 했어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렇게 도망치듯 한국 와서 그 분에게 다시 마음의 문을 열어달라고 매달려보기도 했는데
그 분은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한 때 마음의 문을 연 그 분은 이제 과거속으로 사라져버렸드라고요.
그렇게 개인적으로 다시 다가가는건 불허했지만, 세상의 영혼을 달래주는 성직자의 역할은 제게 충분히 하셨는데
제가 삶의 고비고비마다 힘들어할때마다 그분이 생각나 편지를 쓰곤 했고 그분은 영적 선지자처럼 짧게면 짧게
길게면 길게 답장으로 삶과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친절히 안내해주시기도 했지요.
(아 참 이 편지를 먼저 읽으실 지철님은 앞서 말씀드린 제 삶의 스토리를 모르시겠구나. 편지마다 일일이 한 얘기
다시 나열해 드릴 수도 없고 어쩌죠. 일단 제 스토리가 뭔 말인지 모르시겠으면 지나간 제 편지 참조하시길 ㅎㅎ)
마지막으로 연락한게 몇 년 전 아버지 돌아가실 때였던 것 같은데 너무도 힘들어하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어리석고 성숙하지 못한 채 흘러간 과거속에 갖혀 두려움에 떨며 삶을 살았던 제게
순간 순간의 삶을 살고 과거로 이미 흘러가버린 것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며 온 영혼을 다해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신 너무도 소중한 은사시고 제 삶의 선생님이시죠. 한 때 연인같고 친구같고 가족같고 구루같던
아버지처럼 엄격했으나 엄마처럼 자상한 모습도 있던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같은 파랗고 깊은 맑은 눈을 가지셨던 나의
외국인 선생님.
때에 따라 얼굴이 확확 바뀌셨는데 어떤 때 보면 X파일의 멀더를 닮기도 하고 어떨 때 보면 몽고인 같기도 하고. 한국
인 중에도 닮은 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그 애정의 조건이라는 옛날 드라마에 나오셨던 이종원이란 배우랑도 닮았던
것 같아요.
얼마전 건빵 선생과 별사탕이라는 드라마에서 본 지철님이 맡으셨던 태인이가 문득 생각이 나네요. 태인이의 그 불굴의
열정이 젊은 날의 저를 닮은 듯해서 미소짓기도 했는데. 태인이의 사랑의 방식은 불도저같아요. 저도 그런 면이 좀 있는데,
평소 소심한 저도 살아보니 태인이처럼 대범한 면도 있더라구요. 한번 꽂힌 것은 물불 안가리고 달려들며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게 저랑 닮았어요. 어리지만 너무도 남성적인 멋진 아이 태인이.
자신이 학창시절 사랑했던 보리선생님의 결혼도 그 어린 나이에 성숙하게 축복해 줄 줄 알았던 아이. 사랑하는 사람을
삼촌에게 뺏기고 그들이 알콩달콩 깨 볶으며 사는 모습을 평생 옆에서 조카로서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할텐데, 그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마음을 낸 우리 태인이의 용기가 새삼 존경스럽네요. 일상에서의 슬픔이 제일 큰 건데 그 슬픔을
용기로 이겨냈잖아요. 어리지만 진짜 멋지고 존경스러운 아이들이 있더라구요.
지철님이 언젠가 좋은 인연을 만나시어 결혼하시면 서로의 주머니 속에 눈 달린 조약돌이 되어 일상 속에서 충만히
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년 저도 태인이처럼 해야겠어요. 어린 태인이도 하는데 반백년 살아온 제가 못하겠어요?
근데 결혼식 전 날 태인이 앞에서 결혼하기 싫다고 아이처럼 울던 보리선생님처럼 우리 지철님도 우시는 거 아니에요?ㅎㅎ
헌신적으로 물불 안가리고 지철님께 달려들던 이 누나를 못잊어서 말이에요. ㅋㅋㅋ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
근데 보리선생님처럼 제게 오실 생각은 마세요. 상상속의 지철님이 현실속에서 진짜 그러시면 뭔가 무척 겁나서 오므라
들것 같은데. 지철님이 결혼식 전 날 그렇게 울면서 학창시절 그렇게 원했던 첫사랑 선생님과의 결혼도 못하시고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저를 기다리는 모습도 차마 못 볼 것 같고. 지철님을 두고 이런 못된 상상을 하고 있는 나의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ㅋㅋㅋ 이런 내 자신이 웃기네요.
아무튼 태인이랑 보리선생은 우연히 1년만에 다시 조우하고 선생님이었던 자신을 향한 태인이의 그 헌신적인 사랑을
떠올리며 자신이 태인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현실에서 둘이 이루어지긴 했죠.
학창시절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싱그러움과 아련한 그리움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충분히 있는게 아닌가 싶은데.
태인은 건빵선생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한 개인으로서 충분히 성장했잖아요. 남과 여의 상민과 기홍처럼 이루어지지 않아도 사랑했던 그 순간만으로 아련한 추억처럼 아름다운게 사랑인거 같아요. 그렇게 평생 떨어져 살아가는 거 나쁘지만은
않은거 같은데.
도깨비의 신이처럼 잠깐의 함께 있음을 위해 평생 고독하게 짝을 기다리다가 그 짝이 죽고 태어나고 잠깐 함께 하고, 죽고 태어나고 잠깐 함께 하고를 반복하는 걸 영겁의 시간속에서 겪는 사람도 있는데 뭐. 아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지 참.
죽음 앞에서는 다 부질 없는 것 같아요.
현실에서 이루어져서 서로 살 섞어가며 알콩달콩 깨볶으며 사는 삶이나
더할 나위 없는 그리움으로 아련하게 서로 떨어져서 일상을 살아가는 삶이나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어차피 그 순간에 감정에 느낌에 생각에 충실하게 그 순간을 살아가면 그 뿐. 그 현재도 다시 과거로 흘러가버리고 미래가
와서 현재가 되면 다시 과거가 되고.
이 챗바퀴처럼 반복되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영겁의 시간속에서 우리란 존재는 감정은 인연은 관계는 다 우주속에서
중력없이 떠도는 먼지같은 거 아닐까요.
만나서 같이 살면 무엇할것이며 헤어져서 그림움에 사무치면서 살면 또 무엇할것인가.
참 이러고보니 삶이 참 공허하다. 공허함으로 삶이 채워지면 안되는데. 순간 순간의 충만함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근데 제가 만약 다시 태어나면 그 삶에서는 지철님과의 인연이 좀 다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현실에서 스칠 일 없고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각자의 일상을 살아나가고 있고 나란 존재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대상을 향해 같이 있는 듯한 상상력을 가동해야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런 일방적인 사이가 아니라,
지철님의 우뚝 선 높다란 코며, 쌍거풀 없는 눈매 밑에 서글거리는 눈동자 속 동공의 움직임이며, 면도로 채 밀어내지 못한
까칠거릴 것 같이 올올이 짧게 선 검은 콧수염들이며, 희지만은 않은 피부의 매끄러움이며, 뭔가 모난 사각형갗은 지철님의
얼굴이며, 허공에서 굽실거리며 부드럽게 내려앉은 지철님의 머리카락이며, 그렇게 지철님을 눈으로 찬찬히 바라보며
지철님의 현존하는 존재를 느끼며 상상력이 아닌 실제 오감을 통해 실제 현실 속에서 지철님을 순간 순간 생생히 느끼면서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화하다 말고 마주친 지철님의 옆모습은 또 어떨까요. 사람의 옆 모습에서는 그 사람의 영혼이 읽힌대요. 지철님의 옆 모습이 기억이 안나네. 그렇게 현실에서 찬찬히 바라보며 지철님이란 존재를 온전히 느끼는 순간이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 생에서는 우리 그렇게 만납시다. 아시겠죠?
저는 계속 이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안대를 다시 끼고 못다한 잠을 좀 더 자야겠어요. 내일 다시 출근해야 하는데 또 다른
일주일이 시작되겠네요.
오늘 하루도 순간 순간 충만하게,
잊지 않으셨죠.
그럼 안녕~ 또 뵈요.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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