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Letter

밀정 : 김우진의 세계관 2024/10/22 07:02:31

이옥수2024 2024. 12. 19. 19:50

지철님,

 

밤잠을 설치다가 세벽에 또 깼어요. 요즘 도통 잠을 잘 못자네. 왜 그러지. 모든 정신 질환의 증상은 

불면증으로 시작한다는데. 또 예전처럼 약을 다시 먹어야 하나. 신경이 편안하지만은 않고 좀 날카롭네요.

 

몇년 전 봤던 영화 밀정을 얼마전 다시 꺼내들었어요. 그 영화에서 지철님의 모습이 어땠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

 

친애하고 존경하는 김우진 동지

 

당신의 세계는 참으로 단순하더이다. 조국의 독립 오직 그것밖에 머리속에 없었던거요?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큰 눈망울을 가진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여인 연계순 동지와 알콩달콩 좀 연애하면서

독립 운동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오?

 

사진관에서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던 당신의 주춤거리는 듯한 허리춤이 이 새벽에 떠올라 내 답답해서 그러오.

자신의 삶을 다 포기하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 마음 바쳐 싸웠던 당신의 삶이 미안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 긴장감과 공포속에서 무슨 연애가 될까 싶기도 하지만. 당신도 하나에만 온전히 집중하는게 두가지가 동시에 되는

멀티 태스킹형 인간은 아닐지도 모르겠소.

 

복잡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변화해가는 이정출 동지의 세계보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평면적인 당신의 세계가 더 끌리는 것은

어찌보면 시종일관 변함 없이 불꽃처럼 맹목적으로 타오르는 당신을 보니 내 모습과 어딘가 닮아 보이기도 하고 해서

그런가보오. 잔악한 일제에 대항해 목숨을 건 피말리고 긴장된 싸움을 매일 하는 당신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이자만 내 삶에서도 이 세계의 이상향을 위한 정치적 신념이 있다오.

 

그 어떤 불평등없이 모든 사람이 걱정없이 평등하게 행복하게 잘살며 정의로움이 일상으로 넘쳐나는 사회. 그 정의로움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강물의 물결처럼 도도히 흐르는 그런 세상.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세계요.

 

정치라는 것은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오. 사람들의 삶의 재화를 배분하고 결정하며 사회를 돌아가게 하지. 정치는

나의 일상과 멀리 떨어진 듯 해도 곳곳에서 나의 일상을 파고 들고 있음을 느끼오. 그렇게 일상의 삶에서 작동하며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치유하는 손길이란 말이오.

 

정치적 종교적 신념은 사람들과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영역이지. 그것만큼 사람을 맹목적으로 하게 하는 건 없으니까.

 

이런 거창한 말을 하고 있는데도 감옥에서 나와 가마니속에 실려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그 죽은 연계순 동지의 그 검은

피로 얼룩진 조그맣던 발가락이 떠오르오. 처참한 고문의 휴우증같던 그 어린아이같이 자그맣던 창백히 비틀어진 

발가락 말이오.

 

그 발가락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있겠어? 거창한 정치적 신념이며 이상이며 독립이며 그 모든 머리속의 말들을 지워버리고는 순간순간 자신의 끌림대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다간 한 여인의 가엾은 삶이 마음에서 애절한 슬픔으로 남을 뿐이오.

 

나로서는 상상할 수 도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어둠속에서 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매일을

그렇게 단순함으로 살았던, 사랑하는 조국을 향한 당신들의 눈물어린 삶과 희생에 이 새벽 경의를 표하오.

 

흐르는 시간 속 역사속에 차곡이 묻혀간 당신들의 삶의 희생을 토대로 나의 지금의 안온한 삶도 존재하는 것일테니까.

 

벙어리 김우진 동지,

목숨처럼 소중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개인적 순정도 마다하고 혀를 깨무는 극단의 고통도 감내한 당신. 그런 당신을

생각하면 난 하나의 작은 나약한 미물에 불과하며 나의 신념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의 장난감 같은 것일지도 몰라.

 

1평도 안되는 차디찬 감방에서 하염없이 앉아만 있다가 안식을 찾듯 비로소 모로 몸을 뉘워 당신의 얼굴에 퍼졌던 그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오.

 

장구한 역사속에서 결코 사라져버리지 않을 당신의 그 미소, 그리고 당신의 꽃같은 여인 연계순 동지의 창백하고 검은

발가락을 말이오.

 

그 때 함께 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내가 일상을 파고드는 그 긴장감과 공포를 당신들과 함께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지만. 이 평화롭고 자랑스러운 독립된 나라에서 살게 해줘서 후손으로 그저 고맙소.

 

이 새벽 출근길에서 당신들의 삶에 뜬 조국이라는 새벽달을 떠올리며 일동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