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철님,
오늘은 또 일찍 일어났네요.
그제는 밤 9시부터 잠이 너무 와서 충분한
숙면을 취했는데 어제는 10시까지 잠이 안왔는데
언니가 걱정해서 잠자리에 들긴 했는데 한시간정도
뒤척인거 같은데. 약발이 하루도 안가다니 기분이 좀 그래요.
카누 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너무 새벽이라 마시면
속 쓰릴 것 같아 안 마시고 있어요. 이럴 땐 속을 따끈하게
해주는 전통차가 좋은데 찾아보니 쌍화차가 있어 그거
마시려구요.
제가 원래 커피 안마시는데 최근들어 아침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단 말씀 드렸나요. 지철님을 따라하는
어린애마냥 제가 요즘 이렇답니다.
교회 오빠 좋아하는 중학생 여자아이마냥
취향 수집하고 따라하는 여자애의 심정 비스무리하단
말씀 어디선가 드린 거 같은데. 커피는 너무 써서
평생 입에도 안댔는데 지철님 알고나서 광고하시는
카누를 마셨는데 너무 부드럽고 달콤하기까지 해서
계속 마시고 있어요. 참 신기하죠.
기적이 뭐 별건가요. 쓴 커피 안마시던 사람이
커피가 달콤해져서 홀짝홀짝 마시게 되고
불교신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예수님 영접하고
천주교 신자가 되고, 모두에게 무관심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고 친해지고 싶고.
이런 게 다 기적이라면, 2024년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늦가을과 초겨울은 제게는
삶의 기적들이 남발되는 시간인거죠.
분말 쌍화차인데 마셔보니 나름 괜찮군요.
한방 냄새 나는게 향도 좋고.
고등학교 때 뭔가에 홀리듯 관심이 가서
한의대 가고 싶었는데 성적이 안되서 못갔던 한의사의
길이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고1때까지는 그래도 성적이 좋아서
언니들이 의사되라고 해서
이과를 갔는데 말 그대로 헬이더라구요.
물론 큰언니가 더 아파져서 방황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이과를 선택한 건 진짜 제 인생의 치명타였어요.
이과 생물2랑 화학2랑 물리2랑 수학2랑
진짜 무슨 외계인 언어 같던데.
이과를 선택한 고2때부터 쭈우우욱
제 성적은 급격한 하양 곡선을 그리더군요.
지금은 한의사가 된 제 동기가
선생님이 반 뒷벽 게시판에 전교등수 붙여놓은 종이를 보고는
절 걱정하며,
"옥수야, 성적이 왜 이렇게 떨어지니."
하며 절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문과 취향인 제가 왜 이과를 선/택했나
재수해서 94년 아이큐테스트같던
첫 수능시험을 보고는 다행히
공부 하나도 안하고 문과로 전향해서
불문과로 가긴 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다 언니들
그것도 서울대 법대 나온 언니의
강력한 이끔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어린 저를 서울대 캠퍼스에 자주 데려가면서
나보고 서울대 의대를 가라니.
제2외국어를 독어로 택했는데
독어공부 열심히 해서
의학이 발달한 독일로 유학을 가라니.
제게 멋드러진 꿈을 키워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저도 나름 그게 꽤 괜찮은 꿈이라고 생각했던게
아픈 큰언니를 고쳐줄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만큼 그 꿈이 절절해서
제가 예전 편지에세 30살까지 계속
일하면서 대입 준비했던 얘기 해드렸나요.
언니들처럼 동생처럼 좋은 학벌 가져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것보다
그냥 큰언니를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언니도 죽고 불교를 접하면서
모든 욕망을 내려놨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새벽 한방차를 마시며 옛 추억을 떠올리자니
그 욕망들은 땅 지면에 드러났던 줄기의 싹만 잘랐던거고
땅 밑에는 흙들을 싸고 돌며 그 거대한 욕망의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오싹하네요.
지철님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오싹하실 때가 없으신가요.
전 참 많은데.
자기 성찰적 정서는 좋은데
가끔은 그런 내면을 바라보면서
자기 비관으로 빠질 때가 종종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겐 나름 관대한 편인데
왜 제 자신에게는 이리도 혹독하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좀 자기자신을 사랑해주면 안되나
있는 모습 모자란 모습 그대로.
저는 인생이라는 대서사시의
영웅이 되려는 걸까요.
많은 걸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의 그대로의 모습 인정하고
품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전 성당에서 소개받은
크고 호기심 어린 눈을 한 우리 구역을
담당하시는 저의 아파트 옆 다른 아파트에 사시는
아주머니, 정확히는
나이드신 자매님에게 제 소개를 하며
들은 말이 소환이 되네요.
"저 어린이집 조리사였어요. 지금은 쉬고 있지만.
애기들이 제가 지어준 밥 먹는게 그렇게 이쁘더라구요."
"대학까지 나왔는데, 불문과 였다며.
대학나와서 조리사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
그 말에 아무말 못하고 미소만 짓고는
함께 집까지 걸어가는데 아무말이 잘 안나오더라구요.
아, 그런가. 내 사회적 지위가
대학나온 사람이 할 처지가 아니가.
근데 뭐 그렇게 상처는 아니지만
제가 나름 강단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의 시선에 얼마나 민감한지
깨달았던 순간이었어요.
우리는 인생에서 뭔가 선택을 할 때
얼마나 다른 이들의 시선을 민감하게
떠올리며 선택을 하는 걸까요.
'트렁크'의 정원이 아버지처럼
다른 이들 시선이 무서워서 병든 아내
병원에 입원도 안시키고 가둬두고
정원의 전처 서연처럼
다른 이들 시선 의식하면서
시아버지 장례식장 불편한 자리에
꾸역꾸역 앉아 있고.
저도 그런 삶의 순간들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나도 서울대 법대 언니처럼
서울대 의대가서 그렇게
사람들 존경 받으며 당당하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언니의 병을 고치고 싶다는 건
치기어린 핑계 아니었을까.
이 Social Postion은 제게 있어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 같아요.
언제쯤 저는 이 화두를 풀고
해답을 얻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이 새벽 누군가에게라도
해답을 얻고 싶네요.
되도록이면 빨리.
또 이 급한 서두름.
없던 인내심은 나름 경험을 통해 발달해왔는데
이 서두름은 참 고치기 힘든 습이네요.
어디서 읽은 지철님 인터뷰에서
지철님은 무언가 결정할 때
엄청 고민하고 진중하게
오래오래 따져보고 잘은 기억 안나는데
그런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저랑 완전 반대시던데.
그 침착함과 신중함과 끈기는
천성적인 거겠죠?
전 물건 하나를 사도
이것 저것 따져보고
자료를 수집해서 고르고
뭐 이런 과정이 너무도 귀찮고 성가신
O형의 전형이거든요.ㅎㅎ
그래서 꽂히는 거 그냥 사는 편이에요.
여기저기 들르지 않고
그냥 꽂히는 거.
그런 저의 선택의 과정에
후회는 별로 없어요.
뭐 꼼꼼히 따져봐도
항상 첫번째 고른 답이 정답이었던
국어시간의 여러 문제들 있었잖아요.
저도 그냥 첫번째 꽂히는 선택을
하는 편인데
나름 그런 직관이 정답을 고를때가
많더라구요.
제가 이상한건가요?
신중하신 지철님이 이해못하실 수 있겠네요.
직관의 선택과 신중의 선택
과연 무엇이 답일까요?
적절히 섞으면 안되나 조화롭게.
글을 쓰고 있는데
좀 졸리네요. 잠이 부족한가봐요.
더 잠을 청해보려해요.
지철님은 불면증 다 나으셨어요?
잠 못자는 거 그거 엄청난 고통인데
전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푹 잔 후의 그 상쾌함이
그립기는 하네요.
요즘 하도 지철님께 편지를 남발해서
쓸 말도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맘을 비우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글이 술술 써져 다행이네요.
나의 세상의 환기구, 통로
아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나의 영혼의 창문,
우리 지철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또 생각나면 편지할께요.
안녕히 주무세요.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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