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철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어요. 지철님은 잘 주무셨어요?
이처럼 고요한 새벽에 수원교구 온라인 성경학교에 등록한 신약성서 강해를 먼저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인터넷을 켰는데, Daum을 열어보니 다음의 기사가 눈에 띄였어요.
'노벨상의 도시'스톡홀름에서 이날 오후 4시 시작된 2024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강 작가의 이름은 네 번째로 호명됬다. 한림원 종신위원(전체 18명)이자 노벨위원회 위원인 맛손은 연설에서 "한강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연약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약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거나 다른 질문을 하거나 다른 문서를 요청하거나 살아남은 다른 증인을 인터뷰하기에 충분한 딱 그만큼의 힘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일보 12월 11일자 01:30)
그렇구나, 한강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연약한 인간이구나. 나도 상처받고 연약한 한 인간이긴 한데.
한강은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구나. 근데 위의 내용으로 유추해보건데, 노벨위원회 위원인 맛손은 한강이 질문하는 힘을 가졌다고 했는데 위의 문맥상 이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질문인가요, 타인에게 하는 질문인가요, 아님 둘다에게 하는 질문인가요. 문장 구성이 번역상의 애매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살아남은 다른 증인'이라 하니 타인에게 하는 질문을 의미하는 걸까요.'다른 질문을 하거나'는 꼭 자신에게 질문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다른 문서를 요청하거나' 이 표현은 또 뭘까요.
아무래도 기자가 시간상 급하게 번역을 해서 그랬는지 문맥이 정확히 잡히지가 않아서 기사를 읽고 한동안 이게 무슨 얘기인가 했어요.
한강 시집은 샀는데 한강 소설은 하나도 읽은 것이 없으니 누구를 향한 질문이었는지 제가 판단할 수는 없잖아요. 판단에는 근거가 따르는 법인데, 주로 꼼꼼한 자료수집으로 방대한 연구를 통해 결론을 내기 보다는 그냥 직관적으로 꽂혀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저의 경우 뭔가를 판단하는 거 참 위험한 거 같아요, 그죠?
소설을 안 읽어보고 시만 읽고 대충 한강 소설의 저작 의도등의 기사만 읽는 저로서는 한강의 세계는 타인보다는 자신이 상처받고 연약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약하지만 자신 내면에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사람처럼 보이던데. 남에게 질문할만큼 그렇게 타인에게 별 관심 없던 사람이 역사의 비극을 마주하고 비로소 그 고통의 삶들을 껴앉고 자신의 상처와 연약함에 비추어 그들의 고통을 문학적으로 풀어주려 한 것 같이 보이던데, 아닌가요?
한강 시집은 끌리는데 한강 소설을 다 읽는 건 좀 귀찮던데, 이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그냥 이 새벽 저의 영원한 말동무, 우리 소중한 지철님께 편지를 쓰고 있는거에요.
어제 제가 마지막 편지를 몇시에 썼죠? 그 이후 바로 골아떨어진 거 같은데. 잠은 충분히 잔 느낌은 안들지만, 나름 꽤 잔 것 같은 느낌은 들어요.
오늘은 둘째 언니가 떠나는 날인데, 이제는 더이상 로미오와 줄리엣 놀이는 모살 거 같네요. 이 아쉬움은 뭐지. 지금 언니가 자는 방의 문이 조금 열려있는 상태인데 저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아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언니에게까지 들려서 언니가 깨서 '너 이 새벽에 뭐하니'라고 걱정하는 눈으로 물어보면 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아주 조심스럽고 맘이 좀 졸여지는데, 언니가 깨서 물으면 거짓말은 하기 싫은데.
아 어제 거짓말 했구나. 제가 어제 밤 지철님꼐 편지 쓸 때 어닌가 다가와서 컴퓨터 화면을 보려고 하자 제가 "나 일기 쓰는데 왜 남의 일기를 보려고 해."라며 화면을 손으로 가렸거든요.
그러고 보니 지철님께 보내는 저의 편지들은 대부분 겉으로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지만, 실은 그 냉용은 제 내면을 바라보며 저에게 질문하는 일기 형식이지 않을까 싶네요.
지철님, 어제 편지는 죄송해요.어떠한 근거도 없이 저의 시선으로 오직 직관과 상상력이란 너무 빈약한 근거로 지철님을 판단한 것 같아 지철님 강한 분이라는 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지처님 재밌게 해드리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제가 실수한 거 같아요. 제가 뭔가 재밌고 흥미로우면 남 생각 안하고 막 들떠서 말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의 세째 언니는 저더러 제가 가끔 오류를 범하는데, 남이 무슨 얘기를 하면 내 멋대로 해석해서 소화시키는 경향이 있대요. 이런 경향은 저의 오만에서 비롯된 걸까요. 아님 그냥 독선적인 면이 있는 걸까요? 아님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진지함 없이 그냥 자기 세계에 오는 신호들을 멋대로 해석하고는 하는 인간들의 보편적 실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걸까요. 무슨 얘기를 들으면 자기가 자기 주관으로 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 아닌가 변명하고 싶다가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란 말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그렇지, A라고 누가 말했으면 곧이 곧대로 A라 받아들이면 되는 거고 나의 판단이 들어가서 A'가 될 수는 없는 거지. 그러면 안되는 거지. 그렇구나, 그런거구나.
저도 또 질문을 하고 답을 하고 있네요. 보통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 세례를 퍼붓는 경우가 많던데, 제게도 정원이처럼 내면에 어른아이가 살고 있나봐요. 물론 그 외면에 그를 품어주는 나이 많은 어른이 답을 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 아이의 나이는 한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내면에 그 아이가 가끔 지철님께 실수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께요. 저의 생각과 판단이라는 가시에 찔리지 않으셨길. 물을 맑게하는 버드나무가 아니라 다시 가시나무가 된 기분이에요.
오늘은 기분이 좀 별로네요. 여기까지만 할꼐요. 오늘도 주어진 하루 충만한 하루가 되시길 바랄께요.
p.s. 실은 제가 최근 어느 편지엔가 지철님 많이 사랑하고 위로해드리고 관심을 보이기 위해 지철님께 매일 매일 편지드린다고 말해서 제가 오버한게 아닌가 싶어요. 의무감으로 편지를 쓰긴 싫었는데 그 의무감을 감추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편지들을 남발한 건 아닌지. 이것도 죄송해요. 항상 감성 충만한 상태에서만, 생각 충만한 상태에서만 펜을 들도록, 아니 자판을 치도록 할께요. 그럼 이만 정말 총총.
p.s.2 아님 로미오와 줄리엣 놀이에 빠져서 청개구리 심정으로 더 편지를 많이 한 걸까요? 왜 그런 심리 있잖아요. 하지 못하게 하면 더욱 하고 싶은거 말이에요. 부모님이 반대하거나 저처럼 언니가 반대하면 더 불타오르는 뭔가 때문에 지철님에게 편지를 남발했는가? 잘 모르겠어요. 전 좀 졸려서 더 자다 깨야겠어요. 지철님도 새근새근 편안히 더 주무시길. 그럼 이만. 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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